이 글에서 산산조각 난 신자, 허술한 마법사, 나쁜 전도사는 차례대로 인영씨, 준학씨, 예주 언니를 가리킨다. 이는 내가 수업이라는 제한된 시간동안 알 수 있었던 그들의 일면을 아픈 사람, 교회 오빠, 동물권 이라는 아주 납작한 정체성으로 압축시킨 후 늘린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죄스럽게 생각한다. 처음에 나는 ‘피해를 없었던 걸로 하기 위해 물체를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경향’ 이라는 취소(undoing) 이라는 정신분석학적인 개념으로 이 세 사람을 묶었지만, 쓰다보니 크게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러나 ‘쓰레기’ 나 ‘ 드로잉’ , ‘밑그림’ 이라는 단어들이 떠오르는 세 작업의 외양들이 덧붙이고 쌓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 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 이러한 작업들의 형식이 이들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며 내용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었다.
신에게 구원 받을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있었지만 아무도 대피하지 않고, 재가 되어버린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왜 나를 버리셨나요? 라는 예수의 말처럼 그들이 이윽고 신을 부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남은 것은 가루, 이 흩날리는 가루들은 시야를 방해하지만 모자이크를 하거나 물감을 뭉개는 일과 같이 외상적인 사건이 일어난 후의 효과를 위한 화면 처리, 즉 기호가 아니다. 가루들은 기관지로 숨을 쉴 때 마다 흡입되고 가라앉아 켜켜이 쌓이는 물질이다. 그것들은 합쳐지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스크를 쓰거나 외딴 시설을 만드는 식으로 가루와 우리를 분리시키려고 한다. 이것을 만회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으로 재들이 가루가 되기 이전의 상태로 복원시키는 것은 어떨까? 산산조각 난 물체를 다시 합쳐놓는 것 말이다.
⟪CINDERS⟫ 의 배경은 아버지의 시멘트 공장이다. 그는 자신이 돌을 부수는 사람의 딸이라고 한다. 시멘트에 따르는 마법적인 환상은, 산산조각난 돌이 다시 합쳐져 포장도로와 같이 세상을 연결시키는데 이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시멘트는 돌이 입자가 된 상태와는 다른 물질로, 그것은 순수하지 않고, 유해하게 돌아다닌다. 이 시멘트의 재활용 불가함은 수수께끼와 뒤섞인 쓰레기 같은 조각의 외양에서 더 드러난다. 작가가 부산 영도의 쇠락한 아파트에서 주운 가방을 해체한 ⟪A basework for a wrecked flat⟫, ⟪Not⟫, ⟪rusty iron falling apart⟫ 시리즈는 상처입은 물건을 보존하고 의미를 주려는 것이나 사라진 영국식 사첼백의 주인을 추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 작업들이 전시된 전시의 제목인 ‘cul de sac’ 은 막다른 길이란 뜻으로, 주택 단지 계획의 막다른 길에서 꺾이는 도로 형태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것을 볼 수 있는 것이란 쓰레기 같은 것 밖에 없고, 실종된 여성을 쫓으려다 수수께끼로 인해 방해받고 다시, 쓰레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돌아오는 관객의 곤혹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재활용을 선전하는 포장도로가 전부 속임수라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의 막다른 길을 상상해보자. 이때 u턴으로 되돌아가는 길에서 보이는 풍경은 전부 재활용 할 수 없는, 쓰레기 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인영은 쓰레기들, 가방 안에 들어있었던 소지품들을 나열하며 김언희 시인의 시 「트렁크」의 구절을 언급한다. “ ‘수취 거부로/반송되어져 온’, ‘토막난 추억이 비닐에 싸인 채 쑤셔박혀 있는,’ 가방 속에는 대부업체 명함, 여성용 악세서리(목걸이, 헤어핀), 일회용 화장품, 메모, “헤르만 헤세, 앗아가진 못해요”가 인쇄된 꼬깃한 종이 한 장과 먼지, 녹슨 10원짜리 동전이 들어있었다.” 버려진 가방은 ‘수취 거부로/ 반송되어져 온’ 것으로, 소지품의 주인한테로, 집이 폐허가 되기 전으로 닿을 수 없다. 그러나 닿을 수 있다는 환상 또한 남겨두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버려지고 구제되지 않은, 심지어는 다시 무엇인가로 탄생하는 것에 저항하고 있는 외양의 함의일 것이다. 물론, ⟪Grandma’s time with a feeding bag⟫와 ⟪last dessert;I’ll give you all my love⟫ 에서 드러나는 할머니를 위한 연약한 몸이나 작은 관 같은 조각들의 모습은 정성스럽다. 그러나 철공실에서 버려진 파편 같아 보이는 ⟪noise #1~6⟫시리즈는 다시 부수어진 것,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는 것, 긁히고 닳고 떨어지고 쓰레기 같아지는 것, 외상이 가해져 있는 상태가 바로 함께 있는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 같다. 윙윙거리는 냉장고와 함께 잠드는 것과 같이.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는 것, 이 조각들의 쓰레기 그 자체인 외양은 어느정도 우리가 버려졌다는 암울암을 드리운다. 그러나 그는 재활용하는 것, 그럼으로써 그가 발견한 것 들이 다시 사용될 수 있다는 환상을 끊어내는 동시에, 외상이 가해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또한 부정한다. 즉, 이 사물들은 나아갈 방향을 앞과 뒤로 잃었지만 어쨌든 간에 이중 부정, 긍정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다시 폐허를 찾아가 그것들을 음미할 작정이기 때문에. 가‘방’을 ‘방’ 처럼 펼쳐놓고, 텅 빈 거주지를 훔치고자 하는 욕망의 단서를 남겨놓는다. ⟪Beak⟫ 은 카프카의 단편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주먹으로 도시를 다섯 번 짧게 쳐 붕괴시켰다는 문장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이후, 도시에 남겨진 전설은 이렇다. 프로메테우스는 쪼아대는 부리가 주는 고통으로 자신을 점점 바위 속 깊이 밀어 넣어, 마침내는 바위와 하나가 되었다. 모두가 지쳐 아물고 남은 것은 수수께끼 같은 바위산이었고, 이 바위는 산산조각 난다. ⟪Beak⟫ 에는 이 전설에 의거한 독수리의 부리가 남아있고, 부서진 바위가 바로 프로메테우스라는 몸이라면, 우리는 다시 한번 추리 (혹은 덫에 걸려들어 엉뚱하게 길을 헤매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산조각 난 것은 누구의 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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