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될 수 있으나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CINDERS에 부쳐

유미주

시멘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재료이다. 목재를 포함하여, 지구 상의 다른 모든 재료를 합친 사용량보다 시멘트의 사용량이 많다. 시멘트는 구하기 쉽고, 만들기 쉽고, 사용하기 쉽기 때문에, 지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흔한 재료가 되었다. 서구 사회에서는 로마 시대 이후로 도시의 기반을 형성하였고, 19 세기에는 철근과 열팽창계수가 같다는 기적으로 고층건물과 메트로폴리탄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시멘트는 쉬이 사회의 인식망 속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아니, 잘 보이지조차 않는다. 시멘트는 항상 페인트나 벽지 등의 부자재로 가려지는 탓이다. 그런 시멘트가 사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날 때는 항상 재해의 냄새를 내포하고 있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같은 대형 인재(人災) 사건에서부터, 철근 누락 아파트 같은 붕괴의 가능성을 내재한 일들이 보도될 때, 시멘트는 사회 안에서 하나의 존재자로 인식되곤 한다. 서구 대도시에서부터 현재 모든 마천루를 가능케 한, 철근 콘크리트라는 축복은 붕괴를 앞둔 나약한 상황에서만 사람들 앞에서 자취를 드러낸다. 붕괴를 앞둔 때가 아니더라도, 부자재로 가려지지 않은 시멘트의 민낯은 추가적인 시공과 감춤을 요구하는, 그런 나약한 인상을 내재한다.

최인영은 재생 시멘트 공장에서 시멘트의 이런 유약한 모습을 발견한 듯 하다. 잘게 부숴지고 물과 섞여 천천히 굳어 간 시멘트의 표면은 자글하다. 지난 세기부터 잔잔한 유행으로 끊임없이 사회에 회귀했던 노출 콘크리트와 다르게, 버려진 시멘트 덩이의 다공성 표면은 거칠고, 노이즈로 점철된 화면의 모습과 닮아 있다. 시멘트 덩이들의 형상과 나풀거리는 침엽수처럼 보이는 흐린 화면은 구분되지 않고, 액체 상태로 버무려지는 시멘트 모습과 풀숲에서 흐르는 냇물의 뿌연 형상은 유난히도 닮아 있다.

최인영의 화면은 어떤 때는 나무와, 어떤 때는 강물과 닮아 보이는 시멘트를 계속 보여주고, 이러한 영상은 시멘트의 다공성이 모든 것들과 닮아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다공성이 노이즈라는 가능성과 연결됨을 최인영은 직관한다. 디지털 사회에서는, 노이즈가 모든 이미지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것이 이미 사실이 된 바, 최인영의 화면은 시멘트가 가장 유구히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선천적 가능성에 기인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최인영의 인식은 시멘트가 건국한 사회의 적극적 긍정주의로 귀결하지 않고, 이 시멘트 덩이와 노이즈 잔뜩 낀 화면이 매우 유약하여 언제 바스라질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음을 파악한다. 시멘트로 쌓아 올린 자본주의 도시의 토대는 그 내부를 채우는 인간 존재의 연약함에 기대어 있으며, 삼라만상이 될 수 있는 노이즈는 수만 번의 행렬 연산과 지도 학습이 없이는 복잡계의 연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믹서 안에서 반죽되는 시멘트의 모습과 함께 제시되는 최인영의 진술 “존재는 항상 재난 이후에 등장한다”는 노이즈가 모든 이미지의 가능성을 내포한 채, 데이터 세계를 파괴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처럼 들린다. 많은 것들이 붕괴된 이후에 도래한 사회에서, 그 붕괴를 발판 삼아 태어난 존재들은 허물어진 것들의 토대 위에서 오랫동안 불안할 것이다.

*스테이블 디퓨전의 논리가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이제 너무 자명한 일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