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기, 깎아내기 남은 시(詩)

양효실

오실로스코프(Powdery Oscilloscope)는 (안 보이는) 전기 파형을 시각화하고 분석하는 데 사용되는 일반적인 전자 테스트 장비, 혹은 전압 신호를 그래프로 표시해서 시간에 따른 전기 신호의 모양, 진폭, 주파수 및 타이밍 특성을 눈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장치이다.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조직·관리하는 근대적 시각성의 예시이고, 번역불가능한 전기 신호를 파동(waveform)으로 번역한다는 점에서 기계적인 것으로의 미적인 것의 내파의 예시이다. 인영은 오실로스코프와 자신이 좇는 분말-가루(powder)를 연결해서 만든 “분말 오실로스코프”를 자신의 첫번째 개인전의 제목으로 선정함으로써 볼 수 없는 먼지를 파동과 같은 미적 형식을 통해 시각화하려는 자신의 임무를 사회화한다. 퍼지고 흩어지고 안 보이는 분말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처음부터 아포리아, 모순, 실패를 전제하고 시작하는 영상 작업과 입체 설치이다. 비인간 타자의 말단부에 배정된 유령들, 중력을 모르는/이기는 발-없는 몸들-이미지들과의 인영의 접속/연대는 비유가 아닌 물질로서의, 안 보이지만 실재하는 먼지와의 “연대”를 통해 혹은 글자 그대로 먼지-되기/하기라는 극한의 수행을 통해 일어난다. 일종의 자살적 행위인데, 이러한 내려감-물러섬은 현장을 방문하고 촬영하는 데서, 그리고 이후 후보정을 통한 기록 이미지에 대한 수정을 통해 계속 일어난다. 보기에 전제된 주체와 대상의 위계는 주체를 압도하고 지우는 객체-물질의 편재 속에서 스러지고, 주체는 대상과의 거리를 통해 혹은 상황에 대한 통제를 통해 유사-신의 지위를 누렸던 위치로부터 “아래로 스며들고 의존하는 움직임, 군림하는 주체가 아니라 수많은 비체들과 함께 얽혀 의존하는 저주체(hyposubject)로서 자신을 낮추는 행위”(티머시 모턴)로 자처해서 물러서고 강등된다. 이러한 기꺼이 감수하고 기꺼이 오염되려는 “자발성”이 아니라면 우리는 임박한 몰락의 징후들, 증상들로부터 격리된 환상-이데올로기의 신민들인 주체들일 것이다.


나는 인영의 Cinders(2024년작) 를 교실에서 보았던 선생인데, 보자마자 영상에 매료되었고 빨려들었다. 매혹된 자인 내 입에서 “시적인”이란 감탄사가 터졌는데, 제목이나 화면의 대표-이미지를 작가의 자기-이미지라고 확신하는 내 오래된 편견에 비추어 보아도 다 타고 남은 재, 재현의 통치권을 이탈한 “사물”을 부르는 불가능한 이름이 인영이 선택한 자기-이름이라는 것에 놀랐고, 불면-공황장애-조울증-거식증 등등의 온갖 근대적 인간-여성의 증상을 겪고 있는 인영의 매번의 자살적 작업이 어떤 미사여구-장식-우회로 없이 실재로 직진하고 있음에 아득해졌고, 시는 일어날 장소가 아닐 것 같은 시멘트 공장을 재전유한 인영의 형식적-실험적 스타일이 시를 일으켰음에 매료되었다. 어디서든 혁명이고 어디건 악몽이고 누구나 여기서 혹은 거기서 시작하면 된다는 그런 각성의 예시. 비교적 공장의 외곽을 찍은 영상이었기에, 산을 이룰 만큼 놓이 쌓여 있거나 물에 젖은 모래는 인영의 영상-짜기를 위한 바탕으로, 까끌까끌한 표면으로 다루어졌고,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제목이 재임에, 그 이유를 묻지 않은 채 나만의 방식으로 그 간극, 균열을 즐겼던 것으로 기억한다(그리고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시멘트가 만들어지는 공정을 공부하다가 산에서 채굴한 석회석을 섭씨 1500도 정도의 가마에 넣고 굽고 태워서 남은 가루-덩어리 혹은 인조 자갈을 부르는 이름 클링커를 알게 된다. 클링커를 다시 파우더로 만들어서 모래와 섞은 것이 시멘트이다. 그렇다면 인영이 갖고 온 단어 cinders 즉 재/회(灰)는 나무나 석탄의 재가 아니라 시멘트라는 신물질, 환경 오염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오염물질의 일부분인 것이다. 인영의 재는 시가 될 수 없는 재이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재가 아니라 자연을 뒤덮은 오염 물질인 것이고 시를 죽이거나 시가 불가능해지는 임계점의 재다).


문학적 글쓰기는 증상을 발견하려는 데 혈안인 정신분석가들에게는 “환자” 혹은 언어적 장애인의 문장이다. 글쓰기/에크리튀르란 것이 내가 쓰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쓰는 것이라면, 나는 글이 흐르는 도관일 뿐 정체성도 주체도 아니라면, 기능적 언어에 들러붙은 장식들-살들을 깎아내어서 비로소 언어가 말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주체의 자살적 행위성이 요구된다면, 글쓰기란 기능적-도구적 언어에 장애를 일으키고 불구화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환자가 제-정신을 차리고 다시 정상적 자아를 충전해서 기능적 삶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정신분석가의 임무-소명이라면, 문학적 글쓰기나 어떤 여성적 글쓰기, 유출과 흘러넘침으로서의 글쓰기는 치유를 거부하는 환자-예술가의 말, 혹은 시일 것이다.

현장을 방문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포스트프로덕션까지의 긴 공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연들, 사건들을 최소화하고자 많은 경우 작가는 기획안이나 콘티를 준비한다. 혼자 카메라를 갖고 움직이는 인영은 그러나 자신을 무기력하게, 그저 과잉-노출로 유지한다. 이번 전시의 메인 영상인 <트랙 라인 언더>는 시멘트 공장의 가장 안쪽, 전작 Cinders 가 선취한 재-먼지-파우더를 만드는 방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자신이 이제 무엇을 찍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 지, 그 시작점을 알리는 의 오프닝은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주로 톨게이트 근처에 숨어 있는 시멘트 공장을 목적지로 출발한 자동차 씬이었다. 그리고 <트랙 라인 언더>는 더 안쪽, 공장 노동자도 들어가지 않는 밀실, 컨베이어 벨트가 모래와 섞이기 직전의 파우더를 실어나르는 뿌연 방을 찍었다. CCTV가 노동자를 대신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루의 운송을 바깥 통제실에서 볼 수 있도록 CCTV 곁에 불빛-등이 있는 밀실에 인영은 맨 몸으로, 마스크 없이 맨 눈으로 들어갔다. 증상을 앓는 인영은 먼지에 대해 찍으려는 게 아니다. 아니 찍을 수가 없다. 먼지에 대해 찍는 사람은 거리를 “가진” 사람일 것이지만, 중력을 무시하는 먼지의 움직임을 곧 자신의 몸-감각으로 동일시하는 비체는 먼지-되기도 아니고 먼지-하기를 수행한다. 이미 오염되고 감염된 타자는 어디든 간다. 그러므로 더 아래로 더 나쁜 쪽으로 간다. 그게 시가 움직이는, 시를 만나는 방식이니까. 인영은 컨베이어 벨트를 찍고 컨베이어 벨트 아래 바퀴를 찍었고 창틀에 쌓인 먼지를 찍었고 자신의 불쌍한 카메라, 잘 보게 훈련된 기계-눈을 위해 가끔은 CCTV 옆에 등도 찍어주었다. 숨과 함께 먼지가 몸속으로 침입하는 사람은 재난 현장의 당사자, 마스크도 뚫는 타자에 사로잡힌 이미 경계를 살고 있는 사람이다.


“지구 지각의 상층부에 있는 플라스틱, 뉴클레오티드, 콘크리트와 같이 인간이 만든 물질들에 의해 규정되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티머시 모턴)를 가리키는 인류세는 너머의 자연이나 대안이 사라진, 더 이상 인간의 초월적-초연한 자세로 바라볼 수 없는, 모든 것들이 평등하게 뒤얽혀 있는 낮은 세계이다. 인영의 시멘트 공장을 소재로 한 작업은 인천 굴업도로 촬영을 간 이후 시작되었다고 했다. 인영은 해안 사구, 모래 언덕에서 자연을 본 것이 아니라 시멘트 공장을 본다. 그것은 물과 바람과 모래가 만든 자연 풍경이 아니라 곧 공장으로 옮겨져 시멘트가 되고 콘크리트가 될 예정인 산업적 소재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시멘트 공장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인영에게는 바깥/대안/희망/감동은 지루하거나 가짜이거나 거짓말이니까. 인영은 장미에서 해골을 보는, 태어남에서 죽음을 읽는, 모래 언덕을 통째로 개발-착취의 일환으로 옮겨놓는 그런 응시에 노련하다. 같은 것만 남기고 다른 것은 죽이는 방식으로 우수한 품질의 시멘트를 확보하는 공장 용광로에서 불순물, 차이, 취약한 것은 죽고 사라진다. 시멘트로 지어진 집에서 먹고 살고 자는 우리의 삶은 유기체적이면서 동시에 비유기체적이다. 아직도 제거되지 않은 예민하고 취약한 존재는 먹을 수가 잘 수가 살 수가 없다. 거식증-조울증-공황장애와 같은 인영이 앓는 증상은 인영이 분말-먼지와 모래를 섞은 시멘트를 굳힌 콘트리트에 반응한다는 것, “콘크리트 감옥”이나 아파트나 원룸 월셋방에서 가장 죽음을 감지하는 무능-재능을 현시한다. 인영은 자신의 증상을 “대상과의 물리적 접촉을 통한 감염”으로 읽는다. 그리고 시멘트 공장의 분말-가루 방에서 인영은 대상과의 물리적 접촉을 통한 재-감염을 체화한다. 이것은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어리석음, 잔인함, 명랑함, 절실함 기타등등이다. 글자 그대로의 투항, 연대, 저월이다.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자신의 증상에 대한 사랑, 포옹이다. 자신의 온갖 증상을 해소하고자 병원에서 조제해 준 약물을 “독극물”로 고쳐-부르는 인영의 응시가 “서늘하고”, 인영의 영상을 “서늘한 시”라고 평했다는 L에게서 나는 친밀감을 느낀다.

인영은 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라고 보내온 일기 형식의 에세이에 “나의 촬영은 에크리-튀르와 시네마-튀르 사이를 오간다”라고 적었다. 이는 거의 말할 것이 없는 작가가 찍은 거의 일어나는 것이 없는 장면의 으스스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후보정(post-correction)을 통해 명료하게 나타나려는 부분을 깎아내는 공정에 힘입은 바가 크다. 디지털 영상의 최소단위는 픽셀이다. 장식들-췌언들-속임수들을 걷어내고 사물의 사물성이나 언어의 축어성을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무나 공이나 재였다는 익숙한 이야기에서 “그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픽셀도 포함시키자. 인영은 선명한 이미지, 그러므로 기능적인 이미지를 흐리게-사라지게-물러서게 하기 위해서 픽셀을 지우거나 뒤집는 수정을 가했다. 픽셀의 이미지화라는 순서를 뒤집음으로써, 혹은 이미지를 깎아내는 빼기를 통해서 인영의 먼지는 존재론적 지위를 잃는다, 화면은 더 편평해지고 더 평등해지고 더 흐려진다. 나타나고 인정받고 윤곽이 선명한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은 사회적인 이름들을 얻는 정상적인 방법이다. 도드라지는, 알려지고 읽힐 수 있는 부분을 깎아내고 그럼으로써 눈에서 사라지려는 역순-퇴행을 자처하는 증상 중의 하나가 대부분이 여성인 거식증자의 방법이다. 거의 안/못 먹고 거의 안/못 자고 겨우 숨을 쉬는, 자벌레처럼(!) 길다란 인영은 거식증을 소재가 아닌 형식으로, 서사가 아닌 스타일로 전유하면서 근래 조명이 쏘이고 있는 “거식증 미학”을 발명하는 예술가-하기에 천착하고 있다.

잠재적 재생산 노동 인구인 가임기 여성(female)에게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성의 이미지를 입지 않으려는 거식증자의 “저항”, 가령 가슴 발달, 성적 매력의 증가와 같은 여성화의 중요한 “덕목”을 입지 않으려 먹지 않는, 살-빼기나 살-깎기를 “하는” 이들 소수자 여성들의 자살적 행위는 사회가 장악한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회수하려는 행위이다. 기꺼이 비체화를 선택한, 주체화로서의 종속에서 자신을 빼내는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인 이러한 행위는 대체로 남성-여성 전문가들의 시선을 통해 가부장제에 대한 순응으로 읽혀왔고 당사자들의 자기-쓰기를 통해 단지 순응이 아닌 살려는 충동이 자살적 행위와 겹쳐진 아포리아-모순-실패의 행위성으로 다시 읽히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영이 먼지 방으로 마스크 없이 맨 몸으로 들어가는 것, 홀로 새벽 시간이나 알 수 없는 시간에 사람이 죽어 나갔어도 찍소리 하나 안 들릴 것 같은 가까운 “먼 곳”을 방문하는 것에서 어떤 슬픔(연민은 아니다)을 느끼지만, 동시에 인영의 영상 텍스트의 아름다움, 바깥을 지운 채 안에서 먼지 사이로 시를 일으키는 영상의 “서늘한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시는 대립이 무화되는, 두 극단이 수렴하는 “중성”에서 살아가겠다는 긍정 아닌가! “존재하는 것은 장애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지는 보철을 한 사지이다. 창조성은 존재론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존재론적 장애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음은 끊어지지 않는 실, 즉 아주 가늘지만 끊어지지 않는 실이다. 창조적인 삶은 오직 장애인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기적이다. 인류(humankind)는 그 자체로서 장애적이다”(티머시 모턴)


전시명과 동명인 사운드 설치 작품인 <분말 오실로스코프>는 스피커에서 고역대를 다 “깎아내고” 저역대만 남긴 우퍼 4개를 6개의 철 구조물 중 4개에 구멍을 뚫어 설치한 것이다. 고역대가 주역인 음악의 위계적 구조에서 저역대는 길게 가는 음울한 소리이다. 인영은 접촉을 통한 물질에의 감염과 달리, 사운드는 “자신에게 곧장 스며드는 감각”, 매개 없이 일어나는 감각이라고 구분한다. <분말 오실로스코프>는 투 채널 영상 <트랙 라인 언더>와 대치-적대 상태로 설치되어 있다. 거의 안 들리는 <트랙 라인 언더>의 불가능한 감상을 방해하면서(!) <분말 오실로스코프>의 무한히 반복되는 둔탁한 소리가 침입한다. 심지어 철문에 설치된 우퍼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더 불쾌하고 강력한 끽끽거리기로 전환하는 것, 심지어 전시장을 흔들게 되는 것은 철판의 마찰음 때문/덕분이다. 먼지-물에 적신 흰 거즈를 붙인 우퍼 스피커는 흔들릴 때마다 전시장에 먼지를 흩뿌리고, 우퍼 스피커를 장착한 철문은 금속성의 노이즈를 발산하고. 예술가 인영이 차려낸 자기-돌봄의 의례에 초대받은 우리. 이미 전시장을 방문한 인영의 지인 중 한 사람은 <분말 오실로스코프>를 “파도처럼 덮쳐와서 나를 확 무너뜨릴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석했다고 들었다. 인영은 중력을 따르지 못하는/않는 자신의 몸을 지그시 눌러주는 게 베이스라고, 저역대의 사운드라고 말했었다. 목화솜 이불처럼 눌러주는―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안아주는―사운드 배경음만 남기고 메인은 다 깎아내는 것. 티머시 모턴은 자신의 책 『인류』에 “새로운 폭력 이론이 필요하다”고 썼다.